[전주문화재단 온전] 공연예술 분야 기획자의 창작적 권리에 대한 조명 (2022년 9월호 제6호 기획, 기획자, 기획이라 부르는 것)

2022-09-30

전주문화재단 온전 2022년 9월호 읽기


전주문화재단 온전(穩全)


공연예술 분야 기획자의 창작적 권리에 대한 조명


서유경 변호사  |  2022년 9월호





빛의 뒤편에 서 있는 기획자


“처음부터 끝까지, 온갖 일을 다 하죠. 그것도 딱 중간에서,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말이죠. 때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혹스러운 일을 겪기도 하지만, 때로는 일당백으로 어떻게든 일이 굴러가게 하는 것에서 성취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위 말은, 공연예술 분야에서 약 10년 정도 일한 기획자에게 “어떤 일을 하세요?”라고 물어봤을 때 들었던 대답입니다. 자신을 화려하게 드러내는 것보다는 배경에서 실무를 수행하는 사람 특유의 담담함이 느껴졌습니다. 얼핏 직업적 정체성이 명료하지 않게 들리기도 하지만, 이 답변만큼 현재 시대를 살아가는 기획자의 역할을 정확하게 표현한 말도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기획을 ‘빛’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우리 맨눈으로는 빛의 색을 분간하기 어렵지만, 프리즘 등의 도구로 분해하여 살펴보면 다양한 색채가 연속적으로 나타나더라도 특정한 색 자체가 빛의 색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공연예술 현장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들을 총체적으로 수행하면서도 자신을 먼저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획자는 작품과 예술인들을 먼저 조명하고, 주최 측의 공연예술 사업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 빛의 뒤편에 서 있습니다.


기획자, 관행을 넘어 권리를 말하다 

권리와 의무는 언제나 빛과 어둠처럼 병존합니다. 그런데 유독 기획자에게는 권리보다는 의무만이 강조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술인이든 주최 측이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획자에게 연락하고, 기획자는 늘 해결해야 할 일의 범람 속에서 의무들을 이행하고 있습니다. 늘 할 일이 많고 시간에 쫓기다 보니 기획자는 정작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넘어가지 못합니다.

아마 ‘책임’은 기획자가 가장 많이 듣는 단어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기획이라는 일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고 온갖 일을 하게 하는 씁쓸한 관행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때 ‘재능’과 ‘열정’, 그리고 ‘희생’이란 말이 꼭 따라붙습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지 않나요?”라고 물어보는 것은 의미가 크게 없습니다. 이렇게라도 활동한 경력을 밑천으로 삼아 다음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변호사로서, 저는 “권리를 이기는 관행은 없습니다.”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기획자를 단순히 공연예술 용역계약의 수급인 ‘을’로서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만 파악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기획자 역시 창작의 주체로서 또는 창작의 이웃으로서 어떻게 권리와 의무의 당사자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하고 명확하게 공적인 합의를 이루어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대전제가 되는 이야기부터 해보려 합니다. 모든 법은 시대와 함께 호흡하는 살아있는 유기체입니다. 관점에 따라서 법은 미리 정해진 진부한 규범일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시대적으로 요구한 내용들이 치열한 논의와 공적 합의 과정을 거쳐서 구속력 있는 규범으로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기획자의 권리가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것은 그만큼 기획자의 권리에 대하여 요구하는 바는 적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공연예술 분야에서 기획자의 권리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기획자를 저작권법으로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

현행 저작권법의 관점에서, ① 기획자를 창작의 주체로서 보호할 수 있을지, ② 창작자의 이웃으로 보호할 수 있을지 두 가지 문제를 논의해봅니다.

첫 번째로, 기획자를 창작의 주체로서 보호할 수 있을까요? 현행 저작권법은 아이디어와 표현의 이분법이 적용되고, 아이디어 그 자체가 아니라 창작적으로 표현된 저작물을 보호합니다. 가령, 아이디어만 낸 기획자의 경우 저작자로서 보호되기 어렵지만, 창작적 표현을 담아 기획안을 직접 작성하는 경우 그 기획안의 저작자로서 보호될 수 있습니다. 공연예술 분야의 기획에 관한 직접 사례는 아니지만, 비근한 사례로 국내외 시장에서 방송 프로그램 포맷(format)의 경우 편집저작물로 인정되어 보호된다는 대법원의 판례가 있었습니다(대법원 2017. 11. 9. 선고 2014다49180 판결). 또한 한국저작권위원회의 저작물 등록시스템에서 등록된 저작물 검색을 해보면, 기획안의 경우 어문저작물 또는 편집저작물로서 등록하여 보호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 기획자를 창작자의 이웃으로 보호할 수 있을까요? 우리 저작권법에는 저작인접권(neighboring rights)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저작물을 직접적으로 창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작물의 해설자, 매개자, 전달자로서 역할을 하는 자에게 부여되는 권리를 말합니다. 현행 저작권법에서는 ① 실연자, ② 음반제작자, ③ 방송사업자를 인접권자로 인정합니다. 이때, 기획자는 스펙트럼이 넓은 만큼 자신의 역할에 따라서 인접권자에 포함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가령, 실연자에는 실연을 지휘, 연출 또는 감독하는 사람도 포함이 되니 기획자로서 지휘, 연출 또는 감독도 병행하는 경우라면 인접권자로 인정될 수 있습니다. 한편, 마케팅이나 행정 또는 연구 등에 중점을 둔 기획자는 인접권을 인정받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공연예술은 단체예술로서 예술인, 기획자, 주최 측이라는 세 사람이 함께 수레바퀴를 굴려야 합니다. 변호사로서, 예술인 법률상담을 하다 보면 기획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면 오히려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며, 자신의 고집을 좀 꺾고 손해를 좀 보면 되지 않겠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 저는 바큇살(spoke)이 세 개가 붙은 바퀴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바큇살 세 개가 모두 온전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물론, 기획자라는 역할의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습니다. 오늘날 기획자가 창작자 또는 실연자로서 역할을 겸하기도 하고, 마케터나 행정인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그 뚜렷한 경계를 정하는 것은 어렵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경계가 반드시 뚜렷해야만 기획자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기획자의 많은 정체성과 다양한 역할 중에서도, 바로 어떤 경우에 기획자를 창작의 주체 또는 이웃으로서 보호할 수 있는지 합의점을 찾아가야 합니다.


마치며

공연예술은 단체예술로서 예술인, 기획자, 주최 측이라는 세 사람이 함께 수레바퀴를 굴려야 합니다. 변호사로서, 예술인 법률상담을 하다 보면 기획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면 오히려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며, 자신의 고집을 좀 꺾고 손해를 좀 보면 되지 않겠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 저는 바큇살(spoke)이 세 개가 붙은 바퀴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바큇살 세 개가 모두 온전해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물론, 기획자라는 역할의 스펙트럼은 상당히 넓습니다. 오늘날 기획자가 창작자 또는 실연자로서 역할을 겸하기도 하고, 마케터나 행정인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합니다. 그 뚜렷한 경계를 정하는 것은 어렵기도 하지만, 마찬가지로 경계가 반드시 뚜렷해야만 기획자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기획자의 많은 정체성과 다양한 역할 중에서도, 바로 어떤 경우에 기획자를 창작의 주체 또는 이웃으로서 보호할 수 있는지 합의점을 찾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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